Realm of the Possible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

‘한국드라마 문법공식’에서 본 카페에서 물끼얹기 장면이 떠올라서 ‘물이 앞에 없다면?’ 이런 생각이 들어 떠오른 이야기이다. 좀 시덥잖지만 내 얘기 아니다. 경험담 아니다. 나는 이 비슷한 경험도 없었다. 믿어달라.

——-시작!——-

화났어?

그럼. 난 화가 몹시 나있어.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하지만 흔한 질문에 흔한 대답, 아니 반문을 할 수가 없어서 난 그저 할 말을 잃은 듯 시선을 저 옆에 계신 노트북 액정의 빛을 안경에 반사하고 있는 아저씨에게 돌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것이, 그것이 하고 싶어졌다. 

마주 앉은 상대방에게 물을 촥 끼얹고 싶다. 드라마가 나를 다 버려놓은 것 같다. 몹쓸 미디어! 그렇지만 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어.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님 스타일로. 긴장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얼굴에 확 뿌리는 게 제일 상쾌할 것 같아. 하지만 아끼는 아들을 아무것도 없는 후줄근한 여자애에게 장가보내야하는(그게 어느 정도로 화가 날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으므로 친절히 일어서서 머리 위에 졸졸졸 흘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정 많은 여자. 자, 생각 났을 때 해치워야지? 그래서 내 앞에 놓인 잔을 힘주어 잡았는데… 앗 이건 아직 그 온기를 간직한 카라멜마키아또. 저 바보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이것을 머리에 붓는 건 죽을 만큼 나쁜 짓이 아니면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더 미안해지고 말거야.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바로 일어섰다. 물을 구해야 해!

“어디 가?”

“잠깐 기다려.”

물, 수돗물은 다 같겠지만 예의상 화장실에서 떠온 물은 아니어야겠지. 생수! 생수 사자.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나는 푼돈이라도 돈을 쓴다는 설레임에 신이 난 걸음걸이를 감추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쇼윈도 안의 물은 종류가 많았다. 다 똑같은 물이라고 콧방귀 뀌면 격 떨어진다고 핀잔을 들을 것만 같다. 국산 생수, 프랑스 생수, 빙하수, 해양심층수, 스파클링 워터… 어떤 물이 가장 좋을까? 마시기 좋은 물 보다는 끼얹기 좋은 물. 누구도 모를거야. 상식인인 나는 공짜 물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지만. 영롱한 초록색 병, 유난히 껍데기가 아름다운 저 물이 나를 유혹한다. 

“페리에 주세요! 컵도 하나 주세요.”

이통사 할인을 받고 싶지만 아차 아까 써버렸다. 나의 할인 1일 1회는 이미 지나갔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같이 사두는 건데. 아낄 기회를 놓쳐버렸어. 기회란 얄미운 뒷대머리.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다네. 작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소망하던 바람을 이룰 수 있다는 기쁨에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아까 화났냐고 물어보던 녀석의 얼굴이 과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지. 철저히 준비했다 화를 부르는 언행을 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거야.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나한테 말하지. 내가 사올걸.”

그럴걸 그랬나. 조용히 앉아 물을 잔에 따랐다. 거품이 생기다 마는 느낌이다.

“컵에 따르면 탄산이 달아나잖아.”

불안한 H2CO3는 뚜껑을 열자마자 반응하고 CO2와 H2O로 분해되며 기포를 발생시키지. 그렇게 물 속의 탄산을 잃는 것도 아까워하는 녀석이 나를 잃을 수도 있는 말을 서슴치 않다니. 난 음료에 인위적으로 집어넣은 탄산 같이 불안한 존재야. 나의 뚜껑을 따지마.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편하거든.”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다시 나를 화나게 해줘. 나는 그만 신이 났다.

1 year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