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m of the Possible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

His dark material 시리즈를 매우 재미있게 봐서 나름 존경하고 있었던 작가 필립 풀먼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아이폰 앱스토어에서 전자책을 질렀다. 가격은 19.99 호주달러. 좀 쎄긴 한데 최신작인데다 텍스트는 물론이고 문단에 싱크되어 페이지를 자동으로 넘겨주는 오디오북도 있고 저자 인터뷰 동영상도 있는 알찬 이북이었다. 매우 끌려서 마침 동네 마트에서 25% 할인하는 바우처도 미리 40달러 질러놔서 바로 샀다.

진짜 편했다. 오디오북을 틀어놓으면 내가 손가락 하나 안 움직여도 지가 스크롤해줘. 가끔 너무 긴 문장이 나오면 내 손가락을 움직여야했지만 그런 긴 문장은 소설 전체에서 10개도 나오지 않으니… 또 책 읽어주는 사람이 저자 본인이다. 목소리도 좋은데다 옥스포드 사는 분인데도 어찌나 발음이 정확하고 모범적이신지! 나도 이런 말하기와 책읽기를 추구해야겠다. 성우가 저자 본인인지라 캐릭터의 성격 연기도 저자가 의도한 그대로겠지. 저자가 연기도 잘한다.

Jesus는 괴팍한 원칙주의자인 현자, Christ는 여린 몸과 성격에 형을 사랑하고 몰래 따르는 소심쟁이. 참, 이 책은 예수-그리스도를 두 명의 형제라고 가정하고 성경을 재해석한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긴 성경에 나온 내용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소설 비슷한 것이라고 할까. 예수는 성경에 나온 그 캐릭터이고 그리스도는 그의 쌍둥이 동생이면서 평범하고 형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지만 미움 받고 있기에 형 앞에 나설 수는 없다. 원수도 사랑하라면서 자기 가족은 박대하는 예수를 생각하니 좀 씁쓸하지만 이건 소설이니까. 성경 대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적도 행하는 그 예수가 쭈욱 나온다. 그걸 몰래 따라다니면서 기록하는 그리스도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쯤 되면 알겠지. 이 소설 완전 날로 먹고 있다. 80%는 성경에서 가져와서 옮기고 20% 허구를 보탠 느낌. 난 다 읽고 나서 필립풀먼에게 ‘거장’ 대신 ‘영감탱이’라고 했다. 그래도 예수의 가르침은 지금 봐도 교훈적이어서 그걸 몰아서 정리했다는 걸로도 꽤 좋았다. 사람들이 어떤 멍청한 질문을 해도 알기 쉬운 예를 들어 정확한 깨달음을 주고야 마는 현자의 간지. 게다가 괴팍해서 적절하게 화도 잘내고 흥분도 잘해. 좀 멋지다. 내가 알던 예수는 뭔가 온화하고 인내심 많은 이미지였는데 오래 다닌 교회 목사님이 지적이고 온화한 분이라 그랬나. 

처음엔 제목만 보고 저자가 또 예수를 까려고 쓴 책인가 했는데 내 이런 반응을 생각하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듯. 보너스 인터뷰 영상을 보니 저자가 굳이 까고 싶은 게 있다면 종교 자체나 신이 아니라 신을 대행한다며 자신들이 내린 가치판단으로 사람에게 ‘심판’을 가하는 종교인들인 것 같다. 그렇지. 그놈들이 문제지. 그리고 또 문제가 있다면 이런 식의 날로 먹는 소설을 시리즈(이름하여 Myths)로 기획하고 있는 출판사.

1 year ago